internet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internet ] in KIDS
글 쓴 이(By): virt ( TЯIV)
날 짜 (Date): 2003년 5월 15일 목요일 오전 09시 18분 52초
제 목(Title): [장은수/컨텐츠@Biz] 버추얼은 메시지이다


버추얼은 메시지이다 

조회 312 


'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를 이야기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버추얼'한 현실과 '진짜 현실(real reality)'을 구별지으려는 우리의 의식 
습관을 넘어서는 것이다.

당신이 '버추얼(virtual)'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과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을 뜻하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실제 현실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시공간을 사실적으로 경험'하는 것일 뿐, 이것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상업적 과장의 수사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마치 우마차에서 자동차로 탈것을 바꾼 것처럼, 진전된 
기술의 혜택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잘 이용하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버추얼'과 '리얼'은 미시 물리적인 차원에서는 '아톰(atom)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분하기 어렵다. 그것이 같다고 '착각(?)'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 기관이 대단히 속기 쉽게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감각 기관 자체가 
바로 그렇게 작용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버추얼과 리얼을 '감각 
기관의 능력'을 통해 구분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잘해야 '감각 기관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이러한 물리적,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는 젖혀두더라도, '기술 문화'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기술은 인간 삶의 활동 양식인 문화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인류는 그 새로운 문화를 살아감으로써 세계의 인식 방식을 바꾸고 
미래를 변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기술은 단순히 인간 삶의 바깥에 두고 
필요하면 꺼내 쓸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때로는 머드게임에 빠진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지금의 기술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버추얼과 리얼을 구별지으려 할수록 우리는 
현실의 올바른 인식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우리는 현 단계의 
인류 문화 자체가 버추얼하며, 또한 사이버 문화 자체가 리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사이버 문화에 대한 담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예술가들은 일찍부터 이러한 사실, 즉 '버추얼이 바로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엠마뉴엘 7>에서 최초로 등장한 버추얼한 섹스는 리얼 섹스와 같은 정도의 
쾌락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리얼한 섹스의 뒤편에서, 육체를 희롱하는 
음습한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육체 불만족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몽정처럼 엠마뉴엘의 육체를 엄습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징표로서 해독되지는 
않는다. 

<토탈리콜>이나 <터미네이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버추얼한 것은 여전히 불행의 
시작, 세계를 감염시키는 페스트균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어떠한 유의미한 
일을 하더라도 결국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 속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로서 
해독된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버추얼한 것에 대한 인류의 공포를 극대화하면서(그것은 
주인공의 잠자리를 축축하게 만드는 끔찍한 악몽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동시에 주인공에게 현실이 아니라 버추얼 리얼리티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시킴으로써 '리얼­버추얼 인간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희미하게 내비친다. 이 영화에서 버추얼 인간들은 모두 매트릭스가 꾸는 꿈에 
지나지 않으며, 리얼 인간들은 접속 장치와 단절되자마자 버추얼 리얼리티 
속에서 질식되어 버린다. 

따라서 리얼과 버추얼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메시아로서 
제시되며, 그는 '리얼의 버추얼리티'(매트리스의 꿈에서 빠져나온다)를 깨는 
동시에 '버추얼의 리얼리티'(죽어도 죽지 않는다)마저 깸으로써 리얼과 
버추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리얼과 버추얼을 
구별짓기보다는 리얼­버추얼의 잡종 교배를 통해 탄생할 미래의 문화를. 

사이버 펑크니, 디지털 문화니 하는 것들은 아직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온라인 머드 공동체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버 공간이 개인들에게 기존의 
신분이나 위계를 무시한, 새로운 신분과 위계를 부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머드 공동체는 확실히 리얼 공동체와는 다른 규칙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이 
리얼 공동체에 비해 놀랍게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 새로운 경험 공간이며, 새로운 문화의 원천일 것이다. 

그러나 머드 공동체의 규칙을 리얼 공동체의 규칙과 뒤섞는 연습을 하지 않는 
한, 그곳은 리얼 공동체가 꾸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이버 펑크가 이 지점에서 좌절함으로써 스스로를 음습한 유령처럼 
바꾸어놓았다. 히피들이 보여주었듯이 그 종말은 다음 두 가지이다. 영원한 
현실 회귀 또는 현실의 영원한 도피. 더글러스 코플랜드의 소설 <신을 찾는 
아이들>(문학동네)은 이것을 잘 묘사해 내고 있다. 몽상이 강하면, 늘 현실의 
인식에는 실패하는 법이다. 

그 대신에 미카엘 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버추얼한 환경과 시뮬레이션화한 세계와 함께 사이버 
스페이스는 형이상학적 실험실, 그러니까 리얼리티에 대한 감각을 시험하는 
도구가 된다.' 그렇다. 문제는 이것이다. 리얼에 대한 감각을 시험하기. 
버추얼을 통해 리얼을 창조하고, 리얼을 통해 버추얼을 생산하는 새로운 경험을 
연습하는 문화를 만들기. 사이버 문화가 어떤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경험 극장'들을 통하게 될 것이다.

1984년 SF 작가 윌리엄 깁슨은 다양한 버추얼 리얼리티와 진짜 리얼리티의 잡종 
교배를 통해 창조될 미래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서 '사이버 공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 공간은 단지 PC 통신이나 인터넷의 공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좀더 발전된 컴퓨터 환경에서 인터넷을 통해 육체를 전송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때의 사이버 섹스는 금세 버추얼한 것 이상이 될 
것이다. 콜걸들은 사이버 통장을 통해 돈을 받고 컴퓨터를 통해 자신을 복제 
전송하게 될 것이다. 또한 전폭기 조종사가 화면 위에 나타난 푸른 점들을 향해 
폭탄을 투하한다고 생각해 보라. 가볍게 버튼을 누르는 그의 가벼운 손놀림 
끝에 수십만 명의 생명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이버 문화'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상황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리얼­버추얼한 삶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버추얼은 
메시지이다.'  
2002-11-11 오전 10:57: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ooking for a unique item in the real world...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